Shot thru the heart/망고

부부 금실 좋기로 동네에서 유명한 집에서, 지성은 막내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다. 애초에 부모님께서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주의라 지성은 학업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나이를 먹어갔다. 어쩌다 롤러스케이트에 관심이 가면 관심이 가는 대로, 미술 학원 수강을 원하면 원하는 대로 지성의 부모님은 최선의 지원을 해 주었다. 비록 지성이 도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재능이 아닌 것 같다고 슬퍼해도 그의 부모님은 또 다른 걸 해 보면 된다고 그를 응원했다. 비록 지성이 사람 사귀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낯을 많이 가린다고 해도 자신감이라든가 끈기는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다.

가까운 초등학교, 친한 친구를 따라서 선택한 중학교, 들어가고 싶은 댄스 크루가 소속되어 있는 고등학교까지, 지성은 지성 나름대로 지금까지 나쁘지 않은 삶을 걸어가고 있다. 날 잡고 놀러 갔던 날 센터에서 춤을 추던 사람에게 꽂혀 며칠을 댄스 크루의 존재를 찾는 데에 쓰고, 같이 공고에 가서 기술을 배우자던 친구를 버려두고 혼자 인문계까지 온 것도 순전히 지성의 의지였다. 이번엔 안 될 거예요, 하고 낙심하지 않고 확실히 내 진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성은 교복을 맞추면서도, 새로운 가방과 필기도구를 사면서도 그 댄스 크루에 대한 존경심을 떨쳐내지 못 했다. 입학식 첫 날부터 반드시 리더를 찾아 나를 들여보내 달라고 사정하리라. 지성은 그렇게 다짐하며 3월 초, 삐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매며 학교로 향했다.

하필이면 넥타이가 정렬의 레드라서 조금 거슬리는 걸 빼면 학교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배정받은 반으로 향해 친구를 사귀기도 전에 입학식을 해야 한다며 강당으로 끌려간 것도 빼면 정말 괜찮은 학교였다. 강당에 반별로 줄을 서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 나이에 비해 성장이 빨랐던 지성은 유독 눈에 띄었다. 지성의 앞에 선 남학생들이 하나둘 말을 걸기 시작했다. 지성은 단순히 카메라에 잡힐까 부담스러워 뒤에 섰을 뿐인데 동갑내기의 눈에는 키가 커서 뒤로 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는지 지성은 첫날부터 키다리라고 불렸다. “나보다 2반 유민석이 더 큰데” 지성의 작은 투정에도 그들은 “걔는 중학교에서부터 싸가지 없기로 유명했고, 넌 착해 보이는데?” 하며 지성을 추켜세웠다. 이런 칭찬은 또 처음이라 목덜미만 벅벅 긁었다. “잠시만, 지나갈게.” 선도부 조끼를 입은 선배가 지성과 친구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도 신기해서 그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입학식을 끝내고 반으로 돌아왔다.

종이 치고 교실로 들어온 담임은 본인을 김도영이라고 소개하며 문학을 맡고 있다고 했다. 학교 지도를 큰 티브이 화면에 띄워놓고 자신이 있는 교무실은 어디인지, 보건실과 급식실은 어디인지 정말 중요한 곳만 콕콕 집어 알짜배기로 알려주고는 동아리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이제야 생각난 건데 선생님치고는 굉장히 젊어 보였다.

“우리 학교 동아리는 좀 독특한 게 많아. 이제 슬슬 동아리 얘들이 너네 데려가겠다고 반에 불쑥불쑥 찾아와서 홍보도 하고 그럴 텐데….”

넓은 화이트보드에 동아리 설명이 적혀 있는 B4용지를 붙인 도영이 박수를 두 번 쳤다. 자신을 천러라고 소개했던 애가 구석에서 잠을 자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2교시 시작한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볼이 눌렸는지 새빨갰다. 지성은 천러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급히 시선을 돌리고 눈을 살짝 찌푸린 채 종이에 적힌 내용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축구 동아리, 여행 동아리……. 그리고 지성이 부담스러운 빨간 넥타이임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인 댄스 동아리. 꼭 그들에게 춤을 배우고 말겠다. 꼭 동아리에 들어가 댄스 크루의 일원이 되어 대회에 참여하고 인지도를 쌓을 것이다. 지성의 조그마한 야망은 희망으로 자리 잡았다.

“고민 열심히 해서 꼭 원하는 동아리 들어가길 바라고.”

“쌔앰!”

도영은 교실의 앞문을 벌컥 열고 발을 들이는 처음 보는 학생의 이마를 밀어내고 다시 문을 닫았다. “기다려.” 건조한 목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지성의 시선이 앞문에 달라붙어 도영을 향해 입술을 내밀고 있는 무리에게로 옮겨갔다.

“우리 학교는 아무래도 공부보다는 동아리 활동이 위주라, 동아리 바꾸려면 사유서를 써야 하거든?”

앞문에 달린 조그마한 투명 유리로 교실을 훑어보던 학생 하나와 눈을 마주친 지성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는 사람도 아닌데 오래 보고 있어서 좋을 것도 없었다. …근데 먼저 시선을 피했음에도 꾸준히 뜨거운 시선이 닿는 이유는 뭘까. 지성이 확인을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또 한 번, 아까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교실을 훑어보는 게 아니라 지성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거였다. 그 시선을 깨달으니 꼭 죄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첫날부터 잘못한 게 있었는지 지성은 반쯤 엎드린 자세로 자아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아, 아닌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거 쓰기 복잡하니까 그냥 삼 년 내내 한 우물만 파. 나 귀찮게 하지 말고.”

도영이 말을 끝내고 다시 앞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학생 네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손에는 도대체 손으로 만든 건지 발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홍보 포스터와 수박 무늬 비치발리볼을 든 채였다. 한창 지루했을 학생들이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제일 먼저 들어온 선배(명찰이 우리와 같은 노란색이 아니라 파란색이었다)가 괴상한 포스터를 반 곳곳에 붙이기 시작했다. 포스터는 수작업인지 일정하지 않았고 곳곳에 물감 번진 자국까지 있었다. 곧 포스터에 대한 흥미를 잃은 지성의 시선이 검은 머리칼을 따라 이리저리 바쁘게도 움직였다. 그 시선을 사로잡은 게, 지금 교탁 앞에 서 있는 저 사람이었다. 저 검은 머리보다는 훨씬 침착해 보였다.

“우린 여행 동아리야. 방학마다 여행을 해.”

“우리 작년에 제주도 다녀왔다!”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겠지. 학기 중에 계획만 다 짜두면 할 것도 없을 테니 계속 놀기만 할 거고, 그 자체로도 저 동아리는 이미 ‘놀기 위한’ 동아리나 다름없다고 지성은 생각했다. 어차피 지성의 관심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저 동아리가 여행 동아리이든, 해외 일주 동아리이든 전혀 관심 없었지만. 지성은 까만 필통에서 샤프를 하나 꺼내 아까 받았던 유인물 구석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텅 빈 갱지를 채웠다. 아이들은 정말 흥미가 있는 건지, 단순히 도영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함인지 너도나도 손을 들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지성은 고개를 잘게 저으며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그 손으로는 아까 봤던 비치발리볼을 그리고, 쨍쨍한 태양도 그리고, 바다도 그려보고, 자신의 이름도 꼭꼭 눌러서 적고…….

“이름이 박지성이야? 귀엽다.”

박…지…,

“아까 강당에서 너 봤어. 나 선도부도 같이 하거든.”

성…?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 딱 지성이만 있으면 완벽할 것 같아서.”

종이 위에 꾹꾹 누르며 자신의 이름을 적던 지성의 손이 굳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자신이 들은 것이 제대로 된 것이 맞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생각 회로가 멈춘 것처럼 아무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반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교실의 수많은 시선 역시 지성과 자신의 옆에 서서 신청서를 들이미는 선배에게로 집중되었다. 연신 눈치를 보던 짝꿍이 결국 지성을 부르며 그의 옆구리를 몇 번 쳤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입 꼬리가 시원하게 찢어진 채로 웃고 있는 선배의 명찰에는 ‘나재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바다 그린 거야? 바다 좋아해? 잘 됐다. 우리 이번에 바다 갈 건데, 같이 가자.”

“네?”

“지성이는 산이 더 좋아? 그럼 우리 이번에 산 갈게. 같이 가자.”

“에? 네?”

도대체 저런 질문을 하는 건 뭐고, 같이 가자는 건 또 뭐야. 지성이 쥐고 있던 샤프를 떨어뜨리고, 그 샤프를 주운 재민이 다시 그의 손에 샤프를 들려주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 있는데요, 하고 이야기하면 끝나는 상황일 것을, 지성은 입을 떼지 못 하고 저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뎌내야만 했다. 아, 아까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람이 이 선배였구나. 웃는 낯과 그렇지 않은 낯의 차이가 커서 알아차리지 못 했다. 지성은 책상에 놓인 ‘여행 동아리 드림 입부 신청서’를 한참이고 노려보았다. 그냥 안 한다고 하면 되는데, 거절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재민과 신청서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지성의 시야가 샤프 대신 바닥에 툭 떨어졌다. 한 선배가 재민을 질질 끌고 갔다.

“지성아! 기다릴게!”

“야! 닥치고 빨리 나와!”

“그래. 좀 나가.”

도영이 넷의 등을 밀고 문을 쾅 닫았다. 쾅 닫는 소리에 지성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도영의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았으나 담임이 되었으니 내 열심히 하마, 같은 얼굴로 출석부를 펼쳐 뒤늦게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너 찍힌 거 아냐? 뭐 잘못했어?” 짝꿍의 질문에도 쉬이 대답하지 못 하고 고개만 몇 번 젓자, 짝꿍은 흥미를 잃고 다시 친구와 떠들기 시작했다. 정말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이게 정말 단순히 스카우트 제의인 건지(스카우트까지 가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신종 괴롭힘인 건지 지성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도영이 출석부를 덮자마자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졸업한 중학교와는 종소리가 달랐다.

“어쨌든 일 년 잘 부탁해.”

선생님, 선생님 제자는 이상한 선배가 꼬여서 죽게 생겼는데 잘 부탁한다는 얘기가 쉽게 나오시나요? 아무 잘못도 없는 도영을 잠깐 미워하던 지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앉아 실컷 떠들던 짝꿍의 시선이 지성에게 잠깐 닿았다가 금세 거두어졌다. 아까 그 나재민이라는 선배와 더 깊게 엮이기 전에 당장 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야만 했다. 댄스 동아리의 부장이 누군지 물어보고자 앞문을 벌컥 열고 쌤! 하고 도영을 부르려던 지성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렸다. 3월 초, 아직 완벽하게 봄은 아니다 보니 교실에서는 히터가 나왔고, 복도는 겉옷 없이는 돌아다니기엔 쌀쌀할 정도로 공기가 식어 있었다. 지성은 추운 것도 잊은 채 딱딱하게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지성아, 진짜 우리 동아리 안 들어올 거야?”

쉬는 시간이 되기를 기다린 건지, 차갑게 굳은 재민의 손이 뜨뜻한 지성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옆에 서 있던 재민의 일행은 지성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유유히 그 자리를 떴다. 복도에 나와 떠들던 학생들도 추위를 느끼고 교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넓은 일 학년 층 복도에는 재민과 지성만이 남았다. 지성은 자신의 손 역시 차갑게 변하고 있음을 깨닫고 슬쩍 재민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내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났고, 재민은 아차 싶었는지 괜히 크게 웃으며 아까 보여줬던 신청서를 또 한 번 보여주며 지성의 손에 들려주었다.

“진짜 재밌을 거야. 친구랑 같이 들어와. 혼자 들어오면 더 좋겠지만.”

이 사람 되게 저돌적이네.

“제가 왜요?”

지성의 당돌한 질문에 재민이 어, 하고 눈을 도르륵 굴렸다. 당연히 네, 하고 대답할 줄 알았던 건지, 초면인 주제에 지성을 향한 신뢰가 하늘을 뚫은 건지, 재민은 한참이고 대답을 생각해냈다. 그 짧은 침묵의 시간 동안, 지성은 거절을 하기 위한 문장을 내뱉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몇 개나 있는지 머릿속 깊은 국어사전을 몇 번이고 헤집었다. 싫어요, 괜찮아요, 안 사요, 또 뭐가 있지?

“내가 눈치가 빠른 편인데, 딱 촉이 왔어. 지성이랑 놀러 다니면 재밌을 것 같아.”

“저 이미 동아리 생각해 뒀는데…….”

“뭐? 어디?”

한참 웃고 있던 재민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지성은 그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 하고 두꺼운 입술을 움직였다.

“댄스 동아리요.”

“어! 나 거기 부장이랑 친해, 지성아.”

“네?”

“딱 한 학기만 나랑 놀자. 그러고도 재미없으면 형이 그 동아리 들어가게 도와줄게.”

재민이 또 은근슬쩍 지성의 손을 붙잡았다. 김도영도 내 작년 담임이라 나랑 친해. 진짜야. 꽤 일리 있는 재민의 말에 지성이 망설이기 시작하자, 재민은 바지 주머니에서 헬로키티 볼펜을 꺼냈다. 한 학기면 괜찮으려나. 어차피 댄스 크루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교외 활동은 이 학년부터 가능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성이 어느 순간 손에 쥐여진 볼펜의 끝을 꾹꾹 깨물자, 재민이 소리 내어 웃으며 지성에게 손을 가져다댔다. 재민의 두 번째 손가락이 볼펜을 지성의 입술로부터 떨어뜨려 놓았고, 차가운 손가락이 지성의 입술에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 어라. 지성이 입술을 급히 입안으로 말아 집어넣자 재민이 또 한 번 웃었다.

“대신 재밌으면 나가기 없음.”

재민의 부드러운 시선이 지성의 입술을 지나쳐 그의 눈가에 닿았다. 너 되게 모찌 같다. 일본 떡 알아? 유하게 내뱉는 재민의 언어에 지성이 한순간 숨을 참았다. 기분 나빴어? 미안해. 진심 어린 사과를 내뱉은 재민이 신청서를 말아 쥐었다.

“아, 아니요.”

“그럼?”

“저 그런 말은 살면서 처음 들어 봐서….”

재민이 꽤 크게 웃었다. 문가에 가까이 앉은 학생 한 명이 엎드려 잘 준비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 만큼 크게 웃어 버린 거다. 그 소란의 원인이 본인한테 있다는 사실에 귀 끝으로 열이 몰린 지성이 눈만 깜빡이자, 재민이 신청서를 벽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얼른, 곧 종 치겠다. 결국 지성은 그 위에 자신의 이름을 꾹꾹 눌러썼다.

뭐, 팔려가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입부 신청서, 1학년 1반 6번 박지성, 입부 희망 이유, 나재민 형이 재밌게 놀아준다고 그래서, 희망 여행지, 해운대, 각오 한 마디, 어, 음…. 안녕하세요.

꾸물꾸물 잘도 움직이던 손이 멈추자, 재민은 입부 신청서를 금이라도 되는 것 마냥 품에 소중히 안았다. 각오 한 마디가 안녕하세요야? 너 진짜 귀엽다.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겨우 삼킨 재민이 웃었다.

“그럼 잘 부탁해, 지성아.”

“네? 네…….”

야무진 손길로 지성의 휴대 전화에 자신의 번호까지 남긴 재민은, 지성을 교실 안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고 자리를 떠났다. [재민이형♥] ……. 재민이 완벽하게 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성은 몰래 뒤에 붙은 하트를 지워버렸다.

딱딱한 책상 위로 엎어진 지성이 아까 재민의 손이 맞닿았던 제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뜯었다. 열일곱이 될 때까지 뽀뽀는커녕 손도 한 번 잡지 못 한 지성에게 아무리 실수여도 그렇지 남의 손이 입술에 닿는다는 게, 진짜, 껄끄러운 사람이어도 좀, 신경 쓰이잖아. 지성의 손길이 몇 번 닿자 입술에서 금세 피가 터졌는지, 손가락 끝에 빨간 피가 묻고 혀끝에서부터 쇠 맛이 느껴졌다. 그 맛이 싫어 또 혀를 비죽 내밀었다가 입술에 혀가 스쳐 쇠 맛이 몇 배로 더 진하게 느껴졌다.

피하려다가 오히려 더 깊게 엮이는 거 아냐? 지금 이 상황처럼.

Shot thru the heart

w. 망고

나는 분명 사람 사귀는 거 진짜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 진짜 낯 많이 가려서 어릴 때도 부모님 품 아니면 몇 시간 내내 울었다고 그랬는데. 겨우 서너 달 만에 이렇게 성격이 뒤집힐 수가 있나? 지성은 최근 들어 자신의 정체성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재민의 불도저 같은 성격을 이기지 못 하고 얼떨결에 들어간 여행 동아리에서 생각 외로 적응을 굉장히 잘하는 바람에 2학기가 되면 그만둔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모호한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얼마 안 있어 못 하겠다고 털어놓고 사유서를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성 본인조차도 제가 왜 이러는지 알 턱이 없었다. 동아리 첫 시간부터 박지성 환영회 한답시고(물론 신입은 많고 많았으나 박지성 환영회라고 이름 지은 건 순전히 재민의 의견이었다) 담 넘어서 치킨 사 오다가 걸리고, 수위 아저씨에게 혼나는 와중에도 치킨 빼돌리다가 도영에게 걸려서 두 시간 가까이 반성문을 쓰는 와중에도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던 게 문제였나. 아니면 그 다음 주 동아리 시간에 우리 지성이가 가고 싶다는 ‘해운대’를 가기 위한 계획을 짜왔다며 다크써클을 달고 등장한 재민을 보고 오바라고 이야기했던 게 잘못이었나. 지성은 애초에 그곳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금세 동아리 부원들과 친해졌다. 정확히는 나재민하고만.

얼마나 친해졌냐면, 늘 혼자였던 지성의 등하굣길에 정반대 방향인 재민이 추가될 만큼? 어쩌다 가끔 오락실에 들려 나란히 서서 총 게임과 철권을 하다가 재민이 학원 시간을 놓쳐버릴 만큼? 공부엔 전혀 흥미가 없다던 지성을 도와주겠다며 도서관에 남아 공부하다가 둘이 나란히 잠들어서 막차를 놓칠 만큼? 아니면, 그 공부가 도움이 되긴 했는지 첫 번째 지필 고사에서 백 점이 세 개나 나올 만큼? 고작 네 달의 시간이었으나 둘은 꽤 가까워졌고 지성의 일상에 재민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성은 절망했다. 재민은 지성에게 처음 다가왔던 3월의 모습 그대로였으나 7월 중순의 지성은 아니었으니까.

우리 지성이, 우리 햄찌, 우리 모찌, 별 같잖은 수식어를 전부 붙여가며 제 이름을 부르던 재민의 목소리가 안 들릴 때면 지성은 스스로가 정말 햄스터가 된 것처럼 귀를 쫑긋거렸고, 늘 뒤에서 저를 와락 끌어안으며 보고 싶었다고 소리쳐야 할 재민의 몸뚱이가 보이지 않을 때면 지성은 괜히 지나가는 선배 한 명 붙잡고 재민이 형 오늘 어디 갔어요? 하고 물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남의 인생은 물론 연애사에도 크게 관심을 가져 본 적 없는 지성이 어느 날 “나 재민 선배 좋아해” 하고 고백한 동아리 친구 현진의 사랑에 약간의 저주를 쏟은 것도, 그 아이의 사랑이 짝사랑으로 마무리되었을 때 자신의 방안에서 나이스를 외친 것도, 정말 지성만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재민이 형은 내가 안 보인다고 해서 날 찾을 일 없을 거 아냐. 잔물결 한 번 일지 않고 평온하기만 했던 지성의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나 그 형 좋아하는 건가? 그렇담 각 잡고 들이대면 되는데 그걸 왜 못 하지?

지성은 재민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정의내리지 못 한 채, 여행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음에 절망했다. 고민이 섞이고 섞여 잔뜩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 해답을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도 하지 말 것을 그랬다. 물론 시작할 때는, 그러니까, 재민의 눈빛에 이끌려 신청서를 썼을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당장 휴대 전화도 꺼 버리고 컴퓨터도 꺼 버리고 옆 동네에 사는 사촌 누나네 집으로 도망가 버리면 여행 같은 거 안 가도 되지 않을까. 책임감 없다고 욕 좀 먹으면 어때, 꼬우면 자르라고 해. 나 댄스 크루 들어갈 거니까. 지성의 입술이 잔뜩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입술은 괜한 욕설만 내뱉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행 간다고 사 온 남색 백팩에 옷이며 세면도구를 챙기고 있는 걸 보니, 재민을 포함한 동아리 부원에게 받을 어마어마한 양의 미움을 견딜 자신은 없는 것 같았다. 다들 제주도를 외치는 와중에 “우리 지성이가 가고 싶은 곳이 해운대라고 했으니까 제주도는 안 돼” 하고 확고하게 말해버리는 재민 덕에 여행지도, 일정도 전부 지성이 원하는 대로 정해졌으니 빠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그 형은 나 귀여운 후배라고만 생각하면서. 며칠 전 재민이 선물해 줬던 검은색 나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지성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나시를 돌돌 말아 백팩 제일 구석에 처박았다. 일단은 좋아하는 형이 선물해 준 옷…, 아니! 그냥 형이 선물해 준 좋은 옷이니까. 나시와 함께 선물 받았던 선스틱 역시 백팩 앞주머니에 쑤셔 넣은 지성이 금세 무거워진 백팩을 현관 가까운 곳에 내려놓았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재민을 향한 지성의 마음이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깨달았으니, 이제 그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 관한 것 말이다.

재민은 지성의 상황을 알 턱이 없으니 분명 평소처럼 행동할 거고, 그럼 어색함 반 부끄러움 반에 몸서리치느라 고생하는 것은 지성이겠지. 그리고 그 어색함을 들키고 나면 손해를 보는 것도 지성이고, 안 좋은 이야기에 휩쓸려 쫓겨나듯 동아리를 그만두는 것도 지성일 것이다. 언젠가는 그만둬야지, 했던 동아리이긴 하나 이렇게 그만둬야 한다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다들 들떴을 텐데 분위기를 망쳐 버릴 수도 없고.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최대한 숙소에 처박혀 있어야겠다. 지성은 챙길까 말까 한참이고 고민했던 셀카봉을 침대 밑 깊숙한 곳에 발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재민에게 메신저가 도착했다.

[ 재민이형 : 우리 지성이 - 오후 7시 30분 ]

[ 재민이형 : 상비약이나 수건 같은 건 형이 다 챙겼으니까 몸만 와도 돼 ㅎㅎ - 오후 7시 30분 ]

[ 재민이형 : 지성이 그만두면 안 되니까 형이 더 잘해야겠다 그치? - 오후 7시 31분 ]

띠링띠링, 쉬지도 않고 소리를 내는 휴대 전화에 시선을 준 지성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우리 지성이는 뭐고, 더 잘해야겠다, 는 또 뭐고……. 우리 사이에 잘한다고 해서 바뀌는 게 뭐가 있다고. 아프다고 거짓말 치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연락을 보낸 재민의 메신저를 한참 들여다보던 지성은 짧게 답장했다. 어차피 우정 다음 관계로 넘어가지 않을 사이라면 차라리 지성이 손해를 보는 편이 나았다. 지성만 참고 넘기면, 나만 모른 척 넘겨버리면 지성의 마음 깊숙한 곳은 아무도 알아챌 수 없을 테니까. 원체 지성의 성격이 그러했다. 남에게 피해를 줄 바에야 스스로가 조금 아프고 마는 편을 택했다. 그 ‘남’이 재민이라는 게 조금 거슬렸지만.

[ 나 : 네ㅎ - 오후 7시 39분 ]

[ 재민이형 : 오늘 푹 자 지성아 내일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 오후 7시 40분 ]

데리러 오긴 뭘 데리러 와.

[ 나 : 아 안 오셔도 되는데??? - 오후 7시 44분 ]

[ 재민이형 : 어차피 터미널 가려면 지성이 동네 지나쳐야 하더라고 - 오후 7시 44분 ]

[ 재민이형 : 전화하면 내려와 - 오후 7시 44분 ]

지나치긴 또 뭘 지나쳐? 존나 정반대면서….

[ 나 : 아... 네 - 오후 7시 45분 ]

[ 재민이형 : 잘 자 우리 지성이>< - 오후 7시 46분 ]

아직 잘 시간 아닌데. 아직 저녁도 안 먹었고, 롤 접속 보상도 못 받았는데…. 결국 지성은 재민을 향한 걱정과 고민이 쌓이고 쌓여 무거워진 몸뚱이를 이끌고 화장실에 들어가 칫솔을 물었다. 누구 때문에 방학하고 나서 계속 잠을 설쳤는데, 그 누구는 속 좋게 잘 자라는 얘기나 하고. 보글보글 입안에 쌓이는 거품을 뱉어내고 입을 헹군 지성이 다시 꾸물꾸물 기어가 침대에 엎어졌다. 그래도, 수많은 고민과 끝없는 가설의 주체인 사람이 잘 자라고 했으니, 조금은 잘 수 있지 않을까. 지성은 선풍기를 최대로 틀어놓고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 눈을 감았다. 자꾸 아른아른 거리는 저 재수 없는 얼굴이 나재민인 것만 아니면 정말 기절하리만큼 피곤했다.

*

지성은 결국 한숨도 못 잤다. 사 월 즈음 지성에게 아침밥 먹이겠다고 일찍부터 문 앞에서 토스트 사 들고 기다린다던 재민의 말에도 잘만 잤던 것 같은데, 그때에서 얼마나 지났다고 어떻게 새벽 내내 뒤척일 수가 있는지. 감정이 깊어지고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스스로를 뜯어말려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몰려와도 소용없음을 진작 깨달은 지성은 결국 이른 시간부터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칼을 만지작댔다. 지성의 까만 머리칼이 손길에 따라 이쪽으로 저쪽으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고작 모자 하나 쓰는 건데 이렇게 신경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의 대답은 당연히 ‘노’겠지만 만약 질문 앞에 ‘재민이 형이 선물해준’이 붙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존나게 예스’가 맞다. 놀러 갔다가 피부 상하면 안 된다며 이것저것 골라 품에 안겨 주려는 재민을 겨우 뜯어말리고 받은 검은색 모자 하나. 지성은 모자를 앞으로 써 보기도 하고, 뒤로 써 보기도 하고, 머리를 넘긴 뒤 써 보기도 하고, 아주 세미 패션쇼를 하다가 윙윙 울려대는 휴대 전화에 급히 아무렇게나 모자를 눌러 쓰고 가방을 챙겼다.

“안녕하세요.”

“모자 쓰고 왔네. 귀엽다. 잘 어울릴 줄 알았어.”

재민이 자연스레 지성이 품에 끌어안은 가방을 앗아 들었다. “제가 들어도 돼요”하고 지성이 손을 뻗었지만 재민은 오히려 그 손에 파워에이드를 쥐여 줬다. 차가운 파워에이드가 손에 닿자 지성이 조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고, 재민은 그게 또 귀엽다며 고개를 젖혀가며 웃었다. 괜히 민망하게…. 지성은 괜히 손에 묻어버린 물기에게 화풀이를 하며 허공에 손을 탈탈 털었다. 정말 이것저것 다 챙겨온 모양인지 재민의 짐이 유독 크고 무거워 보였다. 지성은 비어버린 한 손을 어떻게 할 줄 모르고 한참이고 눈을 껌뻑였다. 함께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나란히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 그랬다. 눈치 빠른 재민이 현재 지성의 상태를 모를 리가 없었다. 재민은 또 한 번 웃으며 자신의 휴대 전화를 쥐여 주었다. 가벼운 짐들이긴 하나 이제야 지성의 양손이 가득 찼다.

“아까 이동혁 전화 안 받던데. 전화 한 번 해 줘.”

“아…. 네.”

지성이 재민의 휴대 전화를 소중하게 쥐고 잠금을 풀기 위해 재민의 손가락으로 손을 뻗었으나, 재민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네 생일”하고 대답하며 손을 치워버렸다. 지성은 그렇구나, 하며 제 생일 여섯 자리를 꾹꾹 눌러 동혁에게 전화를 걸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려 재민을 쳐다봤다. 모자 사이즈 조절이 되지 않았는지 지성이 쓰고 있던 모자가 뒤로 조금 벗겨졌다. 재민은 태연한 표정으로 지성에게 손을 뻗었다. 지성의 시야에 재민이 가득 들어차고,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이 시야에서 빠지자마자 넓게 트인 어깨 뒤로 빠르게 지나치는 건물들이 보이고, 샤워 코롱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재민도 더운 모양인지 뜨거운 몸의 온도가 느껴지고……. 지성의 뒤로 손을 뻗은 재민이 손가락을 움직여 모자의 끈을 살짝 잡아당겨 사이즈를 조절했다. 볼 일을 끝낸 재민이 조심스레 뒤로 물러나며 지성이 쥐고 있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지성이 빨개진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귓가에 휴대 전화를 가져다댔다.

- 야! 전화를 해 놓고 왜 말이 없냐.

“어, 형, 저 지성인데요. 어디냐고 물어보라고 그래서….”

- 뭐야? 둘이 벌써 서울역이야?

“아뇨. 어쩌다 만나서.”

“어쩌다 만나기는. 내가 만나러 온 거지.”

재민의 입을 틀어막으려 손을 뻗었다가 또 한 번 얼굴로 열이 몰린 지성이 조심스레 손을 거두었다. 재민은 또 웃었다. 웃는 게 헤픈 사람이었나?

“어, 어쨌든. 형 어디예요?”

- 나? …가고 있지.

“얘 이제 일어났네. 늦기만 해.”

- 두고 가면 뒤진다!

동혁의 외침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이른 아침, 운전하느라 바쁜 기사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버스 안에서 둘 사이의 정적을 견딜 자신이 없던 지성이 급히 형! 하고 동혁을 불렀으나 전화는 이미 끊긴지 오래였다. 어쩔 수 없었다. 역까지 약 한 시간, 아무리 텅 빈 도로여도 날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든 이 정적을 버텨야만 했다. 이어폰도 안 가지고 온 것 같은데. 걱정부터 앞선다. 지성은 까만 화면으로 돌아온 휴대 전화를 재민에게 돌려주었다. 왜 제 생일이 비밀번호예요? 하고 묻고 싶었으나 지성에겐 그럴 배짱따위 없었다. 두 개의 가방을 하나는 자신의 품에, 하나는 자신의 발치에 내려놓은 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왜 안 물어봐?”

“네?”

지성의 목소리가 어긋났다.

“비밀번호.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아.”

재민의 기대 섞인 시선이 지성의 온몸 곳곳에 닿았다. 아주 닿다 못해 뚫릴 것 같다. 평소에도 낯간지러운 말을 들으면 도망치는 지성을 자주 괴롭히던 재민이었기에, 지성은 이번에도 당연히 재민이 저를 놀리기 위해 밑밥을 깔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왜 제 생일로 해뒀는데요?”

“잊어버리면 안 되잖아. 그럴 일 없겠지만.”

“네?”

또 한 번 어긋나는 지성의 목소리가, 크락션 소리에 묻혔다.

“안 잊어버려야 내년에 챙기지.”

“어차피 저는 2학기면 없을…, 아.”

여전히 웃는 낯이었던 재민이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모자 위로 지성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직 모르지? 여행은 이제 시작이니까.”

“그, 그쵸.”

“동아리 나간다고 해서 우리 둘이 남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겠죠?”

“좀 자, 지성아.”

재민이 지성의 눈가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렸다. “저 안 자도 되는데…” 지성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재민은 아직 멀었다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결국 반항을 포기한 지성의 숨소리가 느려지자, 재민은 손을 떼어내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인 지성을 응시했다. 너무 순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다 알고 저러는 건지. 재민이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그 짧은 시간 동안 잠이 든 지성을 깨워서 역에 도착하고, 비몽사몽 정신이 없는 지성을 잠시 의자에 앉혀놓고 인원 체크를 한 재민이 각자에게 표를 나누어 주었다. 친해지길 바란다며 제비뽑기로 자리를 미리 정해놨음에도 재민은 “지성이 자는 거 내가 챙길게” 하며 슬쩍 표를 바꿔 지성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재민이 준 파워에이드를 품에 안은 채 연신 꾸벅꾸벅 졸던 지성은 당연히 모르는 이야기였다. 다들 시끌벅적하게 기차에 앉을 때도 재민은 한 손에는 가방 두 개를, 한 손에는 지성의 허리를 끌어안고 지성을 조심스레 창가 자리에 앉혔다. 그제야 눈을 뜨고 이곳저곳 둘러보기 바쁜 지성을 토닥이며 다시 재운 것도 재민이었다. 다들 신나서 매점을 털고 올 때도 재민은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어깨를 지성에게 내주었다. 그 어깨가 당연히 제비뽑기로 뽑았던 천러의 어깨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지성은 오히려 더 가까이 붙어 잠을 청했다. 재민은 속으로 온갖 노래를 다 불렀다. 이어폰? 그런 쓸데없는 허연 줄 따위 필요 없었다. 스스로가 주크박스였으니까. 가는 길 지성이랑 보려고 다운 받아 온 영화들? 여름 바다에서 꼭 들어야 하는 플레이리스트 50곡? 전부 필요 없다. 옆에서 박지성이 자고 있는데 재민의 눈에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가 들어올 리가 있나. 슬쩍 지성의 손끝을 잡았다가 놓은 재민도 눈을 감았다.

*

“가자!”

“야! 이동혁! 야!”

KTX를 탈 자본은 없었기에 기차를 이용했고, 그만큼 해운대에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네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바다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뛰어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으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신난다고 뛰어 다니는 사람은 있었어도. 숙소 체크인 후 파라솔과 선 베드 여러 개를 대여해 모래사장 한 곳에 자리 잡은 부원들이 들뜨긴 한 모양인지 하나 둘 바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중 인준을 데리고 뛰어가는 동혁, 끌려가는 인준, 그 옆에서 사진을 찍는 천러, 선스틱을 꺼내 들고 내가 해 줄게, 제가 할게요 하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재민과 지성이 가장 눈에 띄었다. 파라솔이 만든 더운 그늘 밑에 남은 재민과 지성이 손바닥만 한 선스틱을 반씩 쥐고 각자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 제가 한다니까요.”

“너 목 뒤랑 종아리 뒤는 어떻게 바르게?”

지성이 할 말을 잃은 사이, 재민이 지성의 손에서 선스틱을 쑥 빼갔다. 아!

“얼른. 괜히 고집부리지 말구.”

결국 지성은 한숨을 폭 내쉬며 재민에게 등을 보였다. 재민은 속으로 온갖 흥나는 노래를 부르며 선스틱의 뚜껑을 열어 지성의 목 뒤에 가져다댔다. 아, 단순히 본인을 향한 지성의 호감도가 올라가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짓인데, 이거, 생각보다…. 선스틱 특유의 새콤한 냄새와 바다 냄새가 섞여 오묘한 느낌이 났다. 차가운 고체가 닿자 잘게 떠는 지성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재민의 손이 점점 아래로 옮겨갔다. 지성의 목, 아까 스쳤던 어깨와 팔, 옷이 미처 가리지 못 한 등의 일부, 모기에 물렸는지 울긋불긋한 상처가 자리 잡은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 발목……. 고개를 돌리고 연신 헛기침을 하던 재민의 손이 거두어지자마자 지성은 급히 파라솔 밖으로 빠져 나와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는 은근슬쩍 붉어진 귀를 자신의 큰 손으로 덮어 버렸다. 재민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웃으며 선스틱의 뚜껑을 닫아 지성이 챙겨 온 파우치에 넣었다.

“지성이는 바다 들어갈 거야?”

“연애 다 했냐?”

“어…!”

넓은 바다를 훑어보던 지성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동혁과 제노가 지성의 어깨와 다리를 동시에 들어 올렸다. 졸지에 허공에 붕 뜨게 된 지성의 시선이 곧바로 재민에게 옮겨갔다. 재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파라솔에서 나와 동혁과 제노를 막기도 전에, 지성은 둘에 의해 바다로 던져졌다. 풍덩,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깊은 곳은 아니었기에 금방 발을 딛고 일어날 수 있었으나 온몸이 이미 차갑게 젖어버린 뒤였다. 기껏 재민이 선물해 준 좋은 옷이 바닷물에 흠뻑 젖어 지성의 몸에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하늘 정중앙에서 쨍쨍 요란을 떨던 해는 어느 정도 기울었기에 금세 기침이 나왔다.

“지성아! 야, 이동혁!”

수건을 들고 벌떡 일어나는 재민 옆에서 민형이 웃었다.

“와하학. 재민아, 현진이 좀.”

“네?”

민형이 재민의 손에 들린 수건을 앗아 지성에게 다가가는 사이, 짠 바닷물을 한 가득 삼킨 지성이 콜록거리며 주변을 두리번댔다. 바닷물 탓에 흐려진 시야 사이로 보이는 건 지성과 동시에 빠졌는지 나란히 허우적거리고 있는 현진, 그리고 지성을 향해 수건을 들고 다가오는 민형과, 현진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재민이 형?

“지성!”

왜 내가 아니고?

“어, 감사합니다….”

민형이 지성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모래사장에 철퍽 앉히더니 어깨 위로 수건을 덮어 주었다. 열이 덜 빠졌는지 아직까지 후끈후끈한 모래사장 위에 앉으니 연신 나오던 잔기침도 가라앉았으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저 형이 왜 쟤 옆에 있어? 지성의 곁에서 팔짱을 끼고 한참 조잘거리던 민형이 자리를 뜰 때까지 지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듣지 못 하고 재민과 현진을 응시했다. 재민은 하얀 수건으로 현진의 팔을 가볍게 닦아준 뒤 그 수건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지성에게로 뛰어 왔다. 재민의 손에는 수건이 한 장 더 들려 있었다.

김현진 차였다면서. 그래서 마음 접고 동아리 그만둔다며.

“지성아!”

지성의 시선이 뛰어 오는 재민이 아닌 그 뒤에 서 있는 현진에게로 향했다. 현진은 수건으로 자신의 온몸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마음 접었다고 했잖아. 현진의 눈이 재민의 뒷모습에 닿았다가 급히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그 행동을 전부 지켜보던 지성 역시 고개를 돌렸다. 뛰어오던 재민이 덜컥 멈춘 것도 금방이었다. 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살짝 휘청였으나 곧 올바르게 서서 재민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뒤돌았다. 재민은 더 이상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못 하고 멈춰 서서 눈만 껌뻑였다. 재민의 손에 들린 하얀 수건이 더운 바람의 방향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평소엔 온갖 벽을 세워도 다 뚫고 들어오더니 왜 오늘 같이 뻥 뚫린 날엔 안 들어와. 딱 한 발자국이면 되는데. 딱 한 발자국만 오면, 벽이고 뭐고 다 허물어 버리고 당장 어서 오라고 반길 텐데.

차마 닿지 못 하는 원망이 허공에서 바스라졌다. 지성은 이런 원망 한 번 못 하면서 오라마라 꿍얼대는 스스로가 한심해 죽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서 다 할 거면서 뭐 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그만둔다는 말하는 게 뭐 얼마나 걸리는 일이라고 여기까지 질질 끌고 왔을까. 이 미련한 새끼야. 웃음이 다 나왔다. 아니, 눈물인가? 지성은 코끝이 시큰해짐을 느끼고 급히 민형이 건넸던 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덕에 제 얼굴도 가리고 재민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 이거 좀 익숙하다 싶었더니. 지성의 손에 들린 수건은 재민이 집에서 따로 챙겨 온 여분 수건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익숙한 향이 날 수밖에 없지. 이거 완전 나재민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잖아. 지성은 결국 숨을 참았다. 이러고 파라솔 밑까지 가는 거야. 이러고 가서, 좀 누워 있어야지. 그럼 시간이 알아서 할 거야. 난 걔 믿어. 자, 이제, 하나….

“박지성 너 피나!”

“네?”

인준의 외침에 수건에 파묻혀 있던 지성의 시선이 뒤늦게 자신의 다리로 향했다. 아까 일어날 때 유독 힘이 안 들어간다 싶었더니 바다에 빠질 때 무릎이 쓸린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친 걸 몰랐다면 아픈 줄도 모르고 잘만 걸어갔을 텐데. 뒤늦게 눈에 띈 상처는 지금까지의 무관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라도 하듯 뜨끈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고 있었다. 하얀 수건 밖으로 드러난 지성의 표정이 눈에 띄게 험악해졌다.

파라솔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면 수돗가가 있다. 그곳에서 상처를 씻어내고 그 수돗가 근처에 빽빽하게 놓인 벤치에 앉아서 좀 쉬고, 피가 멎으면 돌아가자. 먼저 들어가서 쉬겠다고 얘기하면 다들 알겠다고 할 거야. 그러니까……. 지성의 입술이 달싹였다.

“괜찮아, 지성아? 상처 좀 보여 줘.”

금세 뛰어온 재민이 지성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저 괜찮, 괜찮은데. 저 저기서 좀 씻고……”

고장 났다.

“업혀. 너 이 상태로 걸어가면 아프잖아.”

“저 진짜 괜찮아요.”

“잠깐이면 돼. 뛰어가서 금방 내려 줄게.”

“아, 진짜 괜찮다니까요!”

악 받친 목소리가 지성의 성대를 뚫고 나왔다. 재민의 가방에서 구급상자를 꺼내와 뛰어오던 제노가 굳었고, 나 때문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던 동혁 역시 뒤늦게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봤다. 지성은 재차 수건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사고를 쳤으면 해결을 할 것이지 지성은 당장 도망갈 생각부터 했다.

“아가가 피 나서 놀랐나 보다. 내가 데리고 갔다 올게.”

…아가?

숨기에 급급한 지성과 달리 재민은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했다. 재민은 지성의 돌발행동에 대한 이유를 만듦과 동시에 지성에게 쏠린 시선들을 정리했다. 인준이 들고 있던 구급상자를 받아 지성의 손에 쥐여 주고, 피를 뚝뚝 흘리는 지성 앞에 무릎을 꿇고 등을 내보였다.

“지성, 빨리 약 바르고 와.”

“미안해, 지성아. 오늘 저녁 설거지는 나랑 동혁이가 할게.”

“나도 진짜 미안. 근데 이제노가 먼저 너 빠뜨리자고 했어.”

“넌 그게 자랑이냐?”

소란스러워지는 주변 상황에, 지성은 별수 없이 수건을 자신의 목에 걸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재민의 등에 업혔다. 내가 마른 편이라고 해도 일단은 골격이 있는데, 지금이라도 내려서 걸어간다고 해야 하나. 재민의 어깨를 한 손으로 쥔 손이 달달 떨렸다. 재민은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지성을 고쳐 업으며 자신의 어깨를 툭 움직였다. 지성의 손이 떨어졌다.

“팔 둘러야지 안 떨어져.”

“차라리 떨어지는 게…….”

“속상한 얘기하지 말고.”

재민이 안정적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뜨거운 모래알갱이가 재민의 발바닥에 몇 배는 더 달라붙었다. 꿋꿋하게 한 손으론 구급상자를 쥐고 한 손으론 재민의 어깨를 쥐고 있던 지성이 재민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재민이 돌이나 조개껍질을 피하고자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지성은 어, 어어, 소리를 냈다. 결국 재민이 우뚝 멈춰 섰다. 그 행동에 중심을 잃은 지성의 몸이 앞으로 엎어졌다. 졸지에 재민의 어깻죽지에 지성이 얼굴을 묻은 꼴이 됐다.

“지성아.”

“…알겠어요.”

지성의 온몸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관절에 기름칠 좀 해야겠다는 말이 왜 쓰이는지 단번에 이해가 될 법한 움직임이었다. 직각으로 굽힌 팔이 재민의 목을 끌어안고 교차했다. 오 초면 충분할 행동을 지성은 무려 이 분이나 써먹었다. 재민의 낮은 웃음소리가 지성의 손등에 닿았다. 애꿎은 구급상자만 더 세게 쥔 지성이 이 다음엔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울지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뇌야, 뇌 세포야, 제발 일 좀 해. 주인의 절망 섞인 부름에도 세포 친구들은 근무태만이었다. 마땅한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자. 여기 앉아 봐.”

중간에 헉헉거리는 소리 한 번 낼 법도 한데 재민은 꿋꿋하게 계단을 딛고 올라와 수돗가 근처 튀어나온 돌 위에 지성을 앉혔다. 재민의 손길에 따라 얌전하게 자리 잡은 지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재민의 행동을 주시했다. 당당하게 지성을 안고 온 것 치고는 재민은 부산스럽게 행동했다. 말 그대로였다. 지성을 혼자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 재민 본인이면서 재민 역시 딱히 생각해 놓은 방도가 없는지 계속 수도꼭지를 틀었다가 잠그고, 지성에게 무릎을 보여 달라고 말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다친 건 난데 왜 저 형이 난리야.

재민의 어울리지 않는 당황스러운 모습은, 침묵은 최선의 공격이라고 생각하던 지성이 입을 열게 만들었다.

“……피 씻게 물 좀 틀어 주세요.”

“아, 그치. 아, 아플 텐데.”

나름 보호자 역할을 하겠다고 질질 끌고 왔으면서 저렇게 행동하면 나보고 어쩌라고? 재민은 여전히 굳어 있는 낯으로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 사이에 재민이 “지금이 몇 세긴데 지성이 아픈 거 하나 뚝딱 치료 못 해” 하고 투덜거리는 걸 지성은 다 들었다. 끽,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지성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또 한 번 밀려오는 따가움에 지성이 고통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어떡해, 아, 아프지. ……미안해.”

나재민이 챙겨 준 건 김현진이면서 고작 박지성의 상처에는 본인이 더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거지?

“형이 왜 그런 표정이에요?”

“응?”

바다만큼은 아니었으나 나름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에 지성의 목소리가 묻혔다. 지성의 상처를 바라보던 재민의 시선이 옮겨갔다. 지성의 눈가가 붉다.

“어차피 형은 김현진한테 갔잖아요.”

“현진이? 현진이가 왜?”

또 안 들리겠거니 싶어 물 떨어지듯 제 속마음도 내뱉어버린 지성이 입을 다물었다. 재민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눈치도 더럽게 빠른 인간이 왜 이럴 땐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빨리 알아듣고 이 상황 좀 정리하란 말이야. 원래 박지성이 사고 치면 처리하는 건 나재민이잖아. 근데 왜 여기서만 해당이 안 되는데. 지성은 피가 섞인 탁한 물이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모양새를 지켜보기만 하며 재민의 물음은 애써 모른 척했다. 재민은 조심스레 지성의 목에 걸린 수건을 가져다 물기를 닦아냈다. 저 멀리서 뛰어 노는 사람들의 소리조차 이곳까지 닿지 못 한 건지 유독 조용했다.

“현진이는 왜. 너 현진이랑 싸웠어?”

지성의 눈이 번뜩였다.

“싸웠으면 얘기하지. 지금 같이 노는 거 안 불편해?”

이 형이 뭐라는 거야?

“너 저녁 먹는 거 현진이랑 같은 조 아냐? 지금이라도 바꿔야…….”

“형이 김현진한테 먼저 갔잖아요!”

삐약. 지성의 외침에 수건을 내려놓고 구급상자를 열던 재민의 손이 삐끗했다. 덕분에 구급상자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둘 중 그 누구도 바닥에 떨어진 구급상자에 시선을 주진 않았다. 재민은 지성을, 지성은 허공을 아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재민의 부드러운 시선이 지성에게 향하는 게 느껴질 때마다 지성은 정말 죽고 싶었다.

“그래서 화났어?”

따지고 보면 지금 지성이 재민에게 화내는 데에는 그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었다. 재민과 지성이 사귀는 상황도 아닌데 다른 사람 먼저 챙겼다고 화를 내는 건 이상하다는 이야기다. 둘 사이엔 이런 사소한 것으로 화를 내고, 보듬어 주고 할 건덕지가 없었다. 단순히 친한 선후배 사이에서 나오는 투정이라기엔 도가 지나쳤다. 아, 돌겠네. 지성은 한 번도 쓴 적 없던 욕설을 자꾸 내뱉는 게 누구 탓일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뇨.”

지성은 당연히 재민이 화낼 것이라 단정 지었다. 아무리 지성이 재민에게 정말 아끼는 후배라고 하더라도(제일 마음에 안 드는 수식어이지만) 이건 확실히 지나쳤다.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따지고 들기에는 지성이 지금까지 재민에게 받아 왔던 애정의 양이 너무 많아서 그러기도 애매했다. 괜히 소리쳤다. 그냥 나 혼자 참고 넘어가면 될 문제였는데 굳이 입 밖으로 내뱉어서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됐다. 와중에 착한 나재민은 내 걱정이나 하고. 죽자, 박지성. 당장 삶을 마감하자…….

“아가야.”

“왜요.”

평소에 아가라고 부르면 바로 소리부터 지르더니, 아무래도 머릿속이 많이 복잡한 모양이네. 이미 한 치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계산을 끝낸 재민이 지성의 손을 감싸 잡았다.

“지금 잘만 놀고 있을 현진이가 중요할까?”

“네?”

“아니면 얼굴 빨개져서 열 배는 더 귀여워진 지성이가 더 중요할까.”

“지금 저 놀려요?”

재민은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꾹 눌러 참았다.

지성은 스스로가 굉장히 미워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라지만 오히려 재민은 그런 지성에게 감사했다. 아마 평생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해도 모자를 것이다. 언제 입을 열까, 혹시 지금까지 쏟아 부은 제 열정과 사랑이 지성에겐 너무 부담스러웠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큰 의미가 없었다.

재민이 선도부가 되어 지켜보는 마지막 입학식, 빽빽하게 서 있는 일학년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던 그 아이. 다들 교장이 무슨 말을 해도 관심 하나 없이 떠들기 바쁜데 그 아이만 유독 가만히 서서 웃고 있었지. 옆에서 뭐라고 떠들어도 어색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이는 게 귀여워서 계속 시선이 갔다. 그래서인지 괜히 건드리고 싶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정말 친해지고 싶었다는 거다. 군대도 아니고 하필이면 선도부 조끼가 빨간색일 이유는 뭐냐며 투덜거렸던 그 애증의 조끼를 입고 그 아이에게 다가간 것 역시 순전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지나가면 왠지 스킨로션 냄새 보다는 파우더 냄새가 날 것 같아서. 꿀떡 냄새 이런 것도 날 것 같고. ‘잠시만, 지나갈게’하며 실컷 떠드는 아이들 사이를 가로질렀을 때 잠깐 마주쳤던 그 시선을 잊지 못 하고 무작정 신청서를 싸 들고 지성을 찾아간 거였다.

그냥 무작정. 그 웃는 얼굴이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웃을 때면 광대를 따라 올라가는 그 볼 살이 귀여워서? 삐뚤빼뚤한 글씨로 자기 이름이랍시고 글씨를 적는 게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가득 차서 언제 터질 줄 모르는 애정을 받아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가? 이제 와서 고민하기엔 한참 늦은 주제였으나 지금 대답하라고 한다면 재민의 대답은 ‘좋아서’였다. 그냥, 좋아서. 이유가 어디 있어. 내가 우리 지성이 좋다는데. 재민은 의외로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난 좋아하는 사람 놀리는 취미는 없어.”

하고 당당히 제 마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재민에겐 확신이 섰다. 저 귀여운 박지성이 자신에게 오는 애정과 관심을 단순히 ‘부담스럽다’고 생각하고 넘겨버린 게 아니라는 확신 말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독에 사랑이며 애정을 정신없이 부어서 독의 주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이었다니, 정말,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내가 만약 거기서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겼다면? 재민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사이 지성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후배라서 좋아하는 거겠지. 어쩌다 지나가듯 얘기했던 ‘동생 가지고 싶었다’는 그 문장을 지성은 잊지 못 했다. 아니, 잊지 않았다. 계속 새겨뒀던 거다. 지성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선을 넘으려고 하면 뜯어 말리기 위한 제어 장치나 다름없는 문장이었다. 심지어 지금, 그 제어 장치를 지성의 손에 쥐여 준 장본인이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제어 장치가 제대로 작동할 리가 전혀 없었다. 망가지기 직전이었다.

“……저는 형 안 좋아하는데요.”

최후의 가동이었다.

“응?”

얘가 이렇게 발칙한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지성에 비해, 재민의 눈은 곱게 휘었다.

“왜?”

“네?”

“왜 나 안 좋아해.”

뭐야……? 지성이 눈을 찌푸리고 양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아직 확신이 없어?”

“……….”

“형은 확신했는데.”

재민은 자신의 할 말을 다 끝내고 지성의 손을 놓은 뒤 구급상자를 주워 열었다. 안에 있는 약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확인한 재민이 바닥에 쓸 만한 약들을 내려놓았다. 지성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고민 좀 하라고 시간을 줬더니만 이게 아플지 안 아플지가 우선이라는 건가? 재민이 아프기로 유명한 약을 들어 올리자 지성의 고개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웃음이 터졌다.

“왜, 왜요.”

“지성이는 너 좋다고 하는 사람 앞에 두고 약만 쳐다볼 거야?”

그제야 지성의 뜨거운 눈빛이 재민에게 닿았다. 아, 반쯤 저물어가는 저 해보다 우리 지성이 시선이 더 뜨겁고 좋네. 이제 여름 필요 없을 것 같아. 온종일 밤이어도 돼, 지성이가 내 해고 별이고 달이잖아. 구름도, 비도, 천둥번개도 다 지성이 네가 할래? 재민은 이 긴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한여름 그 자체인 지성의 손을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뜨끈한 두 손이 맞닿았다. 마음 깊은 곳의 온도와 같았다. 단순히 더워서 달아오른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형은,”

“응.”

“형은!”

“왜애.”

“그냥 동생이 갖고 싶어서 저한테 잘해준 거잖아요!”

지성이 재민의 손에 얌전히 물려주었던 제 손을 빼내며 이야기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재민에게 잡히긴 했으나, 지성은 본인 나름대로 화를 표출했다. 억울하다는 소리다.

“나는 형이 잘해주는 거, 챙겨주는 거 보고 오해하지 말자, 오해하지 말자 했는데….”

“지성아.”

“형이 진짜 저를 좋아하면 전 어떡해요!”

지성의 눈에 아주 잠깐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새벽부터 앉아서 형이 사 준 옷을 입을지 말지, 모자를 쓸지 말지, 가서 동아리를 그만둔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얼마나 고민을 했는데. 지성은 당장 목 놓아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엉엉 울기라도 하면 좀 진실 되어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눈물조차 나오질 않으니, 참 이상했다. 집에 혼자 누워서 재민의 생각을 할 때면 금방 울컥해서 베개 끝자락이 젖곤 했었는데. 왜 지금은 멀쩡한 건지.

재민이 한 손으로 지성의 큰 손을 감싼 채 한쪽 팔을 벌렸다. 지성이 확신을 갖지 못 하고 망설이고, 베개를 적시고, 연락하다가 한두 번 붙일 수도 있는 재민의 하트 이모지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할 때 재민은 이미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다. 내가 로봇도 아니고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했겠어.

울지도 않으면서 괜히 훌쩍이는 소리나 내던 지성이 결국 재민의 품에 어색하게 몸을 맡겼다. 재민의 오른손이 지성의 모자를 벗기고 반쯤 젖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그 부드러운 손길이 점점 밑으로 향하더니 이제는 아예 지성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재민의 한 팔로 지성의 모든 것을 끌어안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최대한 팔을 벌려 지성을 받아냈다. 지성의 훌쩍이는 소리가 멈췄다. 재민의 쇄골 부근에 어색하게 볼을 파묻고 있던 지성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재민의 귀에 달려 있는 검은색 피어싱 몇 개가 시야에 들어찼다.

“겨울에는 어디 갈래?”

그 문장이 꼭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하는 것처럼 들렸다. 왜, 구구절절 아주 애절하게 썸탄 다음에는 ‘사귈래?’가 나오는 것처럼.

“……전주요.”

“그래, 그럼 전주 가자.”

지성의 목소리와 재민의 목소리가 겹쳤다. 재민의 뜨겁다 못 해 녹아버릴 것만 같은 적나라한 욕망이 지성에게 닿았다.

“형은요?”

“난 네 옆.”

지성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바다의 파도 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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